명화/유명 화가

에드바르 뭉크 [Edvard Munch]

Artvee 2023. 6. 7.
출생-사망 1863.12.12 ~ 1944.1.23
국적 노르웨이
활동분야 회화, 판화
출생지 노르웨이 뢰텐

 

요약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 유년 시절 경험한 질병과 광기, 죽음의 형상들을 왜곡된 형태와 격렬한 색채에 담아 표현했다.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으며, ‘생의 프리즈: 삶, 사랑, 죽음에 관한 시’라고 부른 일련의 작품을 통해 생의 비밀을 탐사하듯 인간 내면의 심리와 존재자로서의 고독과 불안, 공포의 감정을 깊게 파고들었다.

 

내용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는 1863년 노르웨이 남부의 작은 마을 뢰텐에서 태어났다. 이듬해인 1864년 그의 가족은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로 이주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평생 동안 그를 짓누르게 될 가혹한 운명과 마주해야 했다. 먼저 그가 5세 때 어머니를 결핵으로 떠나보냈다. 그로부터 9년 후에는 누나 역시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여동생은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아야 했고, 엄격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뭉크가 파리에서 살았던 188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남동생도 1895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뭉크 역시 병약하여 질병이 늘 따라다녔다.

뭉크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만, 예술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1879년 오슬로에 있는 기술대학에 들어가 엔지니어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잦은 병치레로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81년 왕립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한 그는 노르웨이의 유명한 자연주의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Christian Krohg)의 문하에서 프랑스 인상주의를 배웠다. 그리고 한스 예거(Hans Jæger)가 이끄는 극단적 자유주의자 그룹인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에 합류했다. 뭉크는 예거에게서 영감을 받아 어둡고 고뇌에 찬 자신의 삶과 심리적 경험, 그리고 사랑과 죽음에 대한 견해를 작품에 반영했다.

뭉크는 1885년에 처음으로 파리를 여행했으며,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를 둘러보며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 폴 고갱(Paul Gauguin)의 작품에 크게 공감했다. 이들의 작품은 뭉크에게 그림의 목적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일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이후 그는 인간 내면의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주제들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으며, 작품 속에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투영시켰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1886년 작 《병든 아이》이다. 뭉크는 누나의 죽음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어린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정적, 슬픔을 표현했다. 이 작품에 대해 비평가들은 거칠고 암울한 묘사 방식에 대해 경악했지만, 뭉크는 이 그림이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뭉크는 26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슬로에서 개인전을 열어 110점에 달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같은 해에 그는 국비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갔으며, 에콜 데 보자르에서 레옹 보나(Léon Bonnat)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 시기에 쓴 뭉크의 『일기』를 보면,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책을 읽는 사람이나 뜨개질하는 여인이 있는 실내 정경을 그려서는 안 된다.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 내밀한 인간의 경험을 충실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뭉크는 프랑스와 노르웨이를 오가며 점차 자기만의 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그의 그림은 거칠고 불안한 선과 함께, 매우 종합적이고 양식화된 드로잉을 특징으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 종종 강하게 대조되는 비자연적이고 강렬한 색채를 이용했다. 이러한 색채는 극적인 효과를 주며 보는 이의 반응을 강하게 이끌어냈다.

1892년 뭉크는 베를린 미술가협회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총 55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는데, 그때까지 그의 작품을 경험하지 못했던 베를린 미술계는 곧바로 파문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언론에서는 성과 죽음, 그리고 폭력의 이미지를 담은 그의 그림을 보고 강하게 비방하고 나섰다. 결국 전시회는 1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뭉크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베를린 미술가협회의 분열을 유발하여 이후 베를린 분리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뭉크는 1893년부터 <생의 프리즈>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생의 프리즈>는 삶과 사랑과 죽음에 관한 시다. 뭉크는 이 연작을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되돌아보려 했으며, 인간 감정의 모든 국면을 형상화시키고자 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 《절규》이다. 《절규》는 뭉크가 ‘생의 공포’라고 부르던 것을 표현했다. 온통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이와 대조를 이루는 검푸른 해안선, 동요하는 감정을 따라 굽이치는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의 병치, 그리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온몸을 떨며 절규하는 한 남자, 이 남자의 절규는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고통에 대한 울부짖음이고, 뭉크는 이를 입 밖으로 표출시켰다. 뭉크는 이 이미지를 다양한 매체로 50점 가량 제작했다.

뭉크는 1890년대에 독일에서 되살아난 그래픽 아트의 영향을 받아 1894년에는 판화를 제작했다. 에칭, 석판화 및 목판화를 다룸으로써 가장 중요한 현대 판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판화는 특히 단순하고 솔직한 형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똑같이 강한 주관성이 두드러졌다. 뭉크는 1904년 베를린 분리파의 정식 멤버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8년까지 독일에 머물렀으며 이 기간 동안 독일 표현주의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평소 조울증과 알코올 중독을 겪었던 뭉크는 1908년에 신경쇠약에 걸려 덴마크 코펜하겐의 병원에 8개월간 입원했다. 이후 건강이 회복되면서 색채가 밝아지고 작품 양식이 변화되면서 이전의 표현주의적 힘은 다소 경감되었다. 뭉크는 1909년 3월 오슬로에서 열린 뭉크 회고전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자신의 고국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뭉크는 주요 거처를 노르웨이로 정하고, 1910년부터 1916년까지는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1916년 오슬로 근교 에켈리에 넓은 면적의 토지를 매입했고, 그곳에 은거한 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뭉크는 1933년 70세 생일에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성 올라브 대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37년 독일의 나치 정부는 뭉크의 그림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독일 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 82점을 압수했다. 말년에 그는 시력을 거의 다 잃었으며,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근처의 에켈리의 집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그의 80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달 뒤였다. 뭉크는 유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오슬로시에 기증했다. 그의 작품은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뭉크 미술관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병든 아이 The Sick Child》(1886), 《절규 The Scream》(1893), 《흡혈귀 Vampire》(1893~1894), 《잿더미 Ashes》(1894), 《사춘기 Puberty》(1894~1895), 《질투 Jealousy》(1894~1895), 《마돈나 Madonna》(1894~1895), 《담배를 피우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Burning Cigarette》(1895), 《병실의 죽음 Death in the Sickroom》(c. 1895), 《생명의 춤 The Dance of Life》(1899~1900), 《마라의 죽음 I Death of Marat I》(1907), 《시계와 침대 사이 Between the Clock and the Bed》(1940~1942) 등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 두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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